
던져져있다 (Geworfenheit)
올해도 봄이 왔다. 나무에는 새순이 돋고 동네 화단에는 꽃이 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벚꽃구경을 가신다며 설레어 하셨다. 나는 어머니께 물었다. 매년 봄마다 보는 꽃인데 나이가 드셔도 꽃이 그렇게 좋으냐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나이가 들면 꽃이 더 좋아진단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존재’란 무언가가 경이로움으로 눈앞에 있는 것이라고 정의 내리면서 인간을 ‘죽음으로 향하는 시간속의 존재’라고 했다. 가톨릭 수도원에서는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라’는 뜻의 말이 주고받는 인사말이라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살아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 어느 날 인가 할머니를 찾아뵌 적이 있다. 나는 마침 카메라를 가지고 있었는데 할머니께서는 영산홍이 흐드러지게 핀 화분을 보여주시며 나에게 이것을 찍어 인화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영산홍이 시들기 전에 찍어두고 친구들이 놀러오면 두고두고 보여줬으면 한다고. 나는 영산홍을 찍었다. (그리고 몇 달 후에 할머니께서 암선고를 받으셨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결국 사진은 재현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진의 모든 것을 의심해도 재현을 떠나서 생각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영산홍은 지지만 사진은 활짝 핀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할머니도 언젠가 내 곁을 떠나실 것이지만 사진은 웃는 표정으로, 그렇지만 조금 슬픈 정조로 ‘남는다’. 그 사실은 너무 기본적이고 단순하여 진부할 정도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확고한 신념은 단순한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믿는다.
이 작업은 마치 비빔밥처럼 여러 가지 요소가 뒤섞여있다. 어쩌면 정돈되지 않은 혼란스러운 면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습과 닮아있을지 모른다. 그 세상에 ‘던져진’ 존재인 우리들 모습처럼 나는 이미지들을 세상에 ‘던져놓는다’. 물론 내가 작업을 할 때 대상들과 교감했던 동일성의 경험들을 완전한 의미로 사람들에게 전달시킬 생각은 없다. 그것은 너무 교육적이고 계몽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지들이 사람들을 통과할 때 그들 속에서 분절되고 해체되어 다시 재조합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