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데거
written at2006.05.18 23:16:14하이데거에 대해 쉽게 써놓은 글이 있어 일부를 옮겨본다.
현상학적 방법의 엄격성으로 생철학의 문제의식을 해명한 것이 『존재와 시간』이 었다. "존재에 대한 물음은 오늘날 망각 속에 묻혀버렸다."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존재와 시간』은 바로 이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무언가가 눈앞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경이로움으로 있다는 것을 뜻한다. 존재가 망각되었다는 것은 존재자(존재하는 것)들을 그 경이로움으로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렸다는 걸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눈을 생각해보자. 가장 밀도 높은 사랑의 상태에서 우리는 사랑의 상대가 눈앞에 있다는 것 자체에 충만함을 느낀다. 그 경이로움으로 충만한 상태에서는 사랑의 상대를 이용한다거나 착취한다거나 배반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랑이 그 밀도와 깊이를 잃어버리고 두 사람의 관계가 형식적 관계로 굳어버리면, 있음 그 자체가 주던 충만함과 놀라움은 사라져버린다. 그 관계가 더욱 척박해지면, 이제 사랑의 관계는 완전히 뒤집혀 이용이나 착취의 관계로 떨어져버린다. 그것이 말하자면, '존재 망각'이다. 놀라움도 경건함도 신실함도 없다. 존재 망각은 대상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자신에 대해서도 유사한 망각이 일어날수 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주위 상황에 매몰돼 무감각하게 기계적으로 살아간다면, 그는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것이다. 이 잃어버린 존재를 되찾는 것, 이것이 인간이 떠맡은 과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실존이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으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염려하는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존을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으로 나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상황에 매몰돼 자기 자신이 아닌 삶을 사는 것이 비본래적 실존이라면, 자기 내부의 참된 가능성을 실현해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 본래적 실존이다. 사람들은 우선 대개는 비본래적으로 산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렇게 사는 삶에 불안이 엄습해 그 무의미한 삶을 흔들어 깨운다. 눈을 뜬 그는 죽음을 향해 앞질러 달려가 본다. 지금 당장 내가 죽는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죽음 앞의 질문에서 본래적 실존을 향한 결단이 이루어진다. 그는 자기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을 기획하고 그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던진다.
......파벌 싸움의 결정적 쟁점 가운데 하나가 니체 해석이었다. 니체는 유럽철학 전체를 형이상학으로 규정하고, 이 형이상학이 허무구의에 떨어진다고 보았다. 니체에개 허무주의는 근대 유런 문명을 병들게 한 정신신적 병원균이었는데, 그는 유럽 형이상학의 모든 가치를 때려부수는 적극적 형태의 허무주의로 이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생(삶)이라는 근본가치를 되살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1930년대 나치 지도부는 이 니체 철학을 유사 생물학적 담론으로 변형시직 독일 민족 우월주의와 반유대 인종주의를 정당화하는 철학적 기반으로 삼았다. 하이데거는 1936년부터 1943년까지 자신의 강좌에서 니체를 반복해서 강의했다. 그는 니체파 허무주의 극복과 형이상학의 극복을 외첬지만 허무주의도 형이상학도 극복하지 못했으며, 전통 형이학의 정점 속에서 허무주의의 감옥 안에 갇히고 말았다고 해석했다. 이를테면, 니체가 주창한 '권력의지'는 서양 전통 형이상학이 낳은 과학기술문명에 깃든 인간의 지배의지의 가장 완고한 형태일 뿐이었다. 이런 니체 해석은 하이데거의 고유한 존재사상에 입각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철학을 외면한 나치 지도부에 대한 반항이기도 했다.
나치 체제의 주변부로 밀려난 뒤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 사상을 더욱 철저히 밀어붙였다. 니체 강의는 그 사상 탐구의 중요한 계기 였다. 니체 강의에서도 드러났듯이, 그는 현대 과학기술 문명을 주요한 대결점으로 삼았다. 그가 보기에 현대 과학기술 문명은 전통 형이상학이 낳은 제어하기 힘든 괴물이었다. 과학기술 문명의 씨앗은 벌써 그리스 철학에서 심어졌다. 존재 자체를 물음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존재자에게 관심을 쏟으면서 자연과 세계를 인간의 뜻에 따라 이용하려고만 하는 태도가 형성됐다. 존재자, 곧 자연과 세계에 대한 탐욕적 관심은 형이상학에서 뚜렷하게 나하났다. 데카르트는 앞시대 철학에 맞서 자신의 철학을 이렇게 옹호했다.
미리 주어진 진리를 단지 추후적으로 개념적으로 분석할 뿐인 저 강단철학 대신에 직접 존재자에게로 향하면서 불과 물, 공기, 별 들과 천체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물체의 힘과 작용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는 철학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전망을 나에게 열었다. ‥‥‥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인식을 적합한 모든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인식을 통하여 우리는 자연의 지배자이자 소유자가 될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드러나듯 데카르트의 자연과 사물에 대한 관심의 목표는 그것들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것임이 명백해진다. 그 자연의 존재에 경외감이나 경이감을 느낄 틈이 없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은 시대를 거치며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달아 현대 과학기슬 문명에까지 이르렀다. 과학과 기술은 자연을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욕망의 정점이다. 이 욕망은 자연과 세계를 계산 가능하고 이용 가능한 에너지의 집합으로 볼 뿐이다.
그런데 이런 과학기술 문명 속에서는 인간조차도 사물과 다를 바 없는 에너지의 집합으로 취급된다. 자연을 가장 효율적으로 개발하고 착취하려면 개발, 착취의 실행자인 인간 자체의 능력을 정확히 계산해 배치해야 하는데, 이런 발상 속에서 인간은 복잡한 형태의 에너지 집합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 과학기술 문명에 이르러 인간은 사물화되었고, 인간과 자연을 포함해 모든 것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그 에너지를 최대한 이용하는 기술문명 체제 자체가 주체가 되었다. 모든 것을 인간중심에서 보고 사물과 자연을 지배하려 했던 인간이 자신이 만들어낸 가공할 체제의 부품,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니체의 권력의지는 이 과학기술 문명 속에 들어 있는 인간의 자기 파괴적 지배의지가 벌거벗고 드러난 것일 뿐이다. 인간이 기술 문명 체제의 부품이 되고 사물의 상태로 떨어짐으로써 삶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공허감이 번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허무주의다. 허무주의가 지배하는 세계가, 말하자면 미국식 자본주의이고 러시아의 공산주의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서로 적대하지만 물질을 삶의 기초이자 핵심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나치즘 또한 최종적으로 귀착한 형태는 허무주의적 기술문명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했다. 이런 역사적 인식에서 보자면 근대 정신을 관통한 계몽의 정신이나 진보의 정신도 보두 허무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현상학적 방법의 엄격성으로 생철학의 문제의식을 해명한 것이 『존재와 시간』이 었다. "존재에 대한 물음은 오늘날 망각 속에 묻혀버렸다." 이 문장으로 시작하는 『존재와 시간』은 바로 이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선 무언가가 눈앞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경이로움으로 있다는 것을 뜻한다. 존재가 망각되었다는 것은 존재자(존재하는 것)들을 그 경이로움으로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렸다는 걸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눈을 생각해보자. 가장 밀도 높은 사랑의 상태에서 우리는 사랑의 상대가 눈앞에 있다는 것 자체에 충만함을 느낀다. 그 경이로움으로 충만한 상태에서는 사랑의 상대를 이용한다거나 착취한다거나 배반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사랑이 그 밀도와 깊이를 잃어버리고 두 사람의 관계가 형식적 관계로 굳어버리면, 있음 그 자체가 주던 충만함과 놀라움은 사라져버린다. 그 관계가 더욱 척박해지면, 이제 사랑의 관계는 완전히 뒤집혀 이용이나 착취의 관계로 떨어져버린다. 그것이 말하자면, '존재 망각'이다. 놀라움도 경건함도 신실함도 없다. 존재 망각은 대상에 대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자신에 대해서도 유사한 망각이 일어날수 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주위 상황에 매몰돼 무감각하게 기계적으로 살아간다면, 그는 자신의 존재를 망각한 것이다. 이 잃어버린 존재를 되찾는 것, 이것이 인간이 떠맡은 과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실존이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으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를 염려하는 삶의 방식을 가리킨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존을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으로 나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상황에 매몰돼 자기 자신이 아닌 삶을 사는 것이 비본래적 실존이라면, 자기 내부의 참된 가능성을 실현해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 본래적 실존이다. 사람들은 우선 대개는 비본래적으로 산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렇게 사는 삶에 불안이 엄습해 그 무의미한 삶을 흔들어 깨운다. 눈을 뜬 그는 죽음을 향해 앞질러 달려가 본다. 지금 당장 내가 죽는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죽음 앞의 질문에서 본래적 실존을 향한 결단이 이루어진다. 그는 자기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을 기획하고 그 가능성을 향해 자신을 던진다.
......파벌 싸움의 결정적 쟁점 가운데 하나가 니체 해석이었다. 니체는 유럽철학 전체를 형이상학으로 규정하고, 이 형이상학이 허무구의에 떨어진다고 보았다. 니체에개 허무주의는 근대 유런 문명을 병들게 한 정신신적 병원균이었는데, 그는 유럽 형이상학의 모든 가치를 때려부수는 적극적 형태의 허무주의로 이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생(삶)이라는 근본가치를 되살려야 한다고 역설했다. 1930년대 나치 지도부는 이 니체 철학을 유사 생물학적 담론으로 변형시직 독일 민족 우월주의와 반유대 인종주의를 정당화하는 철학적 기반으로 삼았다. 하이데거는 1936년부터 1943년까지 자신의 강좌에서 니체를 반복해서 강의했다. 그는 니체파 허무주의 극복과 형이상학의 극복을 외첬지만 허무주의도 형이상학도 극복하지 못했으며, 전통 형이학의 정점 속에서 허무주의의 감옥 안에 갇히고 말았다고 해석했다. 이를테면, 니체가 주창한 '권력의지'는 서양 전통 형이상학이 낳은 과학기술문명에 깃든 인간의 지배의지의 가장 완고한 형태일 뿐이었다. 이런 니체 해석은 하이데거의 고유한 존재사상에 입각한 것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철학을 외면한 나치 지도부에 대한 반항이기도 했다.
나치 체제의 주변부로 밀려난 뒤 하이데거는 자신의 존재 사상을 더욱 철저히 밀어붙였다. 니체 강의는 그 사상 탐구의 중요한 계기 였다. 니체 강의에서도 드러났듯이, 그는 현대 과학기술 문명을 주요한 대결점으로 삼았다. 그가 보기에 현대 과학기술 문명은 전통 형이상학이 낳은 제어하기 힘든 괴물이었다. 과학기술 문명의 씨앗은 벌써 그리스 철학에서 심어졌다. 존재 자체를 물음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존재자에게 관심을 쏟으면서 자연과 세계를 인간의 뜻에 따라 이용하려고만 하는 태도가 형성됐다. 존재자, 곧 자연과 세계에 대한 탐욕적 관심은 형이상학에서 뚜렷하게 나하났다. 데카르트는 앞시대 철학에 맞서 자신의 철학을 이렇게 옹호했다.
미리 주어진 진리를 단지 추후적으로 개념적으로 분석할 뿐인 저 강단철학 대신에 직접 존재자에게로 향하면서 불과 물, 공기, 별 들과 천체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물체의 힘과 작용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는 철학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전망을 나에게 열었다. ‥‥‥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인식을 적합한 모든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인식을 통하여 우리는 자연의 지배자이자 소유자가 될 것이다.
이 인용문에서 드러나듯 데카르트의 자연과 사물에 대한 관심의 목표는 그것들을 지배하고 소유하는 것임이 명백해진다. 그 자연의 존재에 경외감이나 경이감을 느낄 틈이 없다.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은 시대를 거치며 점점 더 극단으로 치달아 현대 과학기슬 문명에까지 이르렀다. 과학과 기술은 자연을 지배하고 소유하려는 욕망의 정점이다. 이 욕망은 자연과 세계를 계산 가능하고 이용 가능한 에너지의 집합으로 볼 뿐이다.
그런데 이런 과학기술 문명 속에서는 인간조차도 사물과 다를 바 없는 에너지의 집합으로 취급된다. 자연을 가장 효율적으로 개발하고 착취하려면 개발, 착취의 실행자인 인간 자체의 능력을 정확히 계산해 배치해야 하는데, 이런 발상 속에서 인간은 복잡한 형태의 에너지 집합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 과학기술 문명에 이르러 인간은 사물화되었고, 인간과 자연을 포함해 모든 것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고 그 에너지를 최대한 이용하는 기술문명 체제 자체가 주체가 되었다. 모든 것을 인간중심에서 보고 사물과 자연을 지배하려 했던 인간이 자신이 만들어낸 가공할 체제의 부품,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니체의 권력의지는 이 과학기술 문명 속에 들어 있는 인간의 자기 파괴적 지배의지가 벌거벗고 드러난 것일 뿐이다. 인간이 기술 문명 체제의 부품이 되고 사물의 상태로 떨어짐으로써 삶 자체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공허감이 번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허무주의다. 허무주의가 지배하는 세계가, 말하자면 미국식 자본주의이고 러시아의 공산주의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서로 적대하지만 물질을 삶의 기초이자 핵심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나치즘 또한 최종적으로 귀착한 형태는 허무주의적 기술문명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았다고 하이데거는 생각했다. 이런 역사적 인식에서 보자면 근대 정신을 관통한 계몽의 정신이나 진보의 정신도 보두 허무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