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근래에 읽었던 '대학생이 쓴' '진지한' 글 중에 가장 맘에 들었던 글이다. 쉽고... 단순명쾌하며... 호들갑스럽지 않고... 분노하고 있으면서... 솔직하고... (마지막으로) 따뜻하다.


----------------------------------------------------------------------------------------------------

만약 그 한 명이 나라면?

오수호 서울대 서양사 00

뜻하지 않는 사고로 배가 난파하여 11명의 승객이 구명보트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보트의 한계수용인원은 10명. 보트가 점점 가라앉고 있다면? 답은 간단해 보인다. 어쩔 수 없지만 1명을 희생하여 10명이 살아남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단서를 붙이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만약 그 한 명이 당신이라면? 모든 이성과 논리는 사라지고 절박함만이 남는다.

●보트에서 내릴 수 없는 이유
최근 대추리에선 보트에서 내리지 않겠다는 1명과 이들을 끌어 내리려는 10명의 싸움이 벌어졌다. 미군기지 확장이전에 반대하며 이주를 거부한 원주민은 680가구 중 69가구. 이들과 함께 한 1000여명의 시위자를 진압하기 위해 1만 여명의 경찰 병력이 투입되었다. 결국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패한 ‘이기적’인 소수들이 보트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국회의 통과를 거친 합법적인 행정 집행을 막아선 그들의 고집이 꺾이고 만 것이다.
범법행위를 마다하지 않은 무모한 투쟁의 이유는 삶의 터전에 대한 강한 애착이었다. 지금의 대추리는 미군에게 땅과 집을 빼앗기고 쫓겨난 주민들이 버려진 개펄을 몸뚱이 하나로 일군 땅이다. 그런데 이 땅을 미군기지 건설을 위해 또 내놓으라고 한다. 억만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자식과 같은 땅을 지키기 위해 주민들은 일어섰다. 과격 단체의 선동에 넘어간 것도, 돈을 더 받아내려는 수작도 아니었다. 내 땅을 지키겠다는 절실한 소망의 표출이었다. ‘한미 동맹의 필요성’이나 ‘주한 미군 철수’와 같은 거창한 문제를 떠나 대추리 사태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정부의 오만함, 갈등을 부추기는 언론
하지만 정부는 설득과 타협에 나서기 보다는 그들이 내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보트가 가라앉을 것처럼 선전하고 그들을 위협하기에 바빴다. 공사 지연에 따른 경제적 손실과 한미 관계의 악화 가능성에만 촉각을 곤두세운 정부는 그들의 주장에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반대 시위자들과 대화를 거부하며 이주 합의자들과 개별 협상에만 나선 정부는 군부대 투입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였다. 미국 정부가 시설종합계획 작성을 6월말에서 9월말로 연장하여 분명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덕분에 죄 없는 전경들이 폭력의 현장으로 내몰려 피를 흘려야 했고 정부는 원하는 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하지만 죽창이 등장한, 시대착오적인 폭력 투쟁에 대해서는 비난의 십자 포화가 쏟아지는 반면, 힘을 앞세워 소수를 궁지에 몰아넣음으로서 끔찍한 비극을 야기한 정부의 경솔한 행위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사태의 본질보다는 '폭력‘에 초점을 맞추며 정치적인 의도로 갈등을 증폭시키는 일부 언론 때문이다. 그 와중에 소수의 희생을 불가피하게 여기는 강압적인 다수의 논리는 더욱 힘을 얻어 가고 대추리 주민들의 절실한 바람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나는 모르겠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가 질서를 확립하는 일이 전경과 시위대의 희생을 담보로 할 만큼 중요한 지, 그리고 한미 관계의 우호를 증진하는 일이 대추리 주민들을 또 다시 삶의 터전에서 내쫓는 것보다 중요한 지 말이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어차피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무관심, 혹은 다수를 위해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체념이 사회에 만연한다면 정작 자신이 그 소수가 되었을 때 나를 도와줄 사람도, 나의 권리를 지킬 수 있는 방법도 없다는 것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549 두개의 문 file 2006-05-23
548 지하철 앵벌이 2006-05-23
547 animism file 2006-05-22
546 현장 file 2006-05-21
545 trans, parent file 2006-05-20
544 들꽃 file 2006-05-20
543 Last Days file 2006-05-20
542 안녕, 시네코아 file 2006-05-19
541 하류사회 [3] 2006-05-19
540 대동제 file 2006-05-18
539 하이데거 [2] 2006-05-18
538 손님 file 2006-05-17
537 4 X 5 [2] 2006-05-16
» 만약 그 한 명이 나라면? 2006-05-15
535 멍멍 file 2006-05-15
534 호경이... 2006-05-15
533 성식이형... 2006-05-14
532 2006-05-13
531 극장안에서 file 2006-05-12
530 졸업전시... file [2] 2006-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