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정체
근현대미술이 그랬듯이 사진도 누군가에 의해서 처음 어떠한 모습들이 선보이게 되면 뒤따라서 유행처럼 그러한 사진의 모습들이 속속 나타나게 되고, 그리고 난 다음에는 이에 따른 이론이 만들어져 이내 하나의 장르 혹은 경향으로서 예술적 틀을 제공하곤 한다. 그러한 사진사적 예라면 아마 19세기의 ‘픽토리얼(Pictorial) 포토’, 20세기 초반의 ‘스트레이트(Straight) 포토’를 들 수 있겠고, 현대사진에서는 6-70년대의 ‘컨셉추얼(Conceptual) 포토’와 80년대의 ‘컨스트럭티드(Constructed) 포토’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현대사진에 ‘포스트리얼리즘 사진(Post-Realism Photo)’이라는 새로운 경향이 확산되고 있고, 이제 국제적으로 하나의 형식으로서 자리하려는 것 같다. 늘 이즘(ism)을 좋아하고, 새로운 이론에 들떠 있는 사람들이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지는 것이 이즘이고 이론이지만, 그러나 포스트리얼리즘의 경우 모처럼 찾아온 사진적 이즘이자 과거에 없었던 사진의 리얼리즘 논의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8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진이나 구성사진이 이즘 또는 경향으로서 널리 유행했던 적은 있지만 그것들은 사진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 현대미술 전반에 걸쳐서 나타난 시대사적인 이즘이자 이론이었다. 때문에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경우는 사진계 내부로부터 자생적으로 태동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은 ‘포스트’라는 접두어를 달고 나타났지만 그러나 아직 명료한 이론적 체계가 세워지지 않은 상태라 단정지어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현재 이러한 경향의 사진들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고, 또 우리 나라에서도 유사한 스타일의 사진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현대사진의 맥락에서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가.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요건

▲ 제프 월, <The quarrel>, 1988, color
동서양 근현대사에서 ‘리얼리즘’ 만큼 그 성격규정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던 사조도 없을 것이다. 엥겔스로부터 고리끼, 루카치, 브레히트, 블로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는 임화로부터 김기진, 김남천, 백낙청, 염무웅에 이르기까지 사상과 문학에서 리얼리즘은 가장 뜨거운 근현대사의 논점이었다. 따라서 리얼리즘은 지금도 그 성격규정이 어렵고 제대로 정체를 밝힐 수 없는 난제로 남아 있는데, 리얼리즘이 이처럼 난맥상을 보였던 것은 일차적으로 사실주의와 리얼리즘에 대한 부정확한 인식과 이에 따른 작가의 창작태도와 표현방법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사 160년을 회고할 때 사진만은 이러한 시대사적인 리얼리즘 논쟁에서 멀찍이 물러서 있었던 것 같다. ‘리얼리티(Reality)’라는 말은 사진사

▲ 샘 타일러-우드, <Five Revolutionary Seconds>, 1999, color
문맥에서 빈번히 쓰이고 또 통용되었던 말이지만 리얼리즘이란 말은 사진의 역사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진의 속성상 가장 빈번하게 쓰여질 걸로 예상된 리얼리즘이 이처럼 전체 사진 텍스트에서 찾기 보기 어려웠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진이 스스로 그 속성을 리얼리즘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사진의 모습을 스스로 리얼리즘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문학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던 리얼리즘 문학이나 혹은 미술에서의 ‘극 사실주의’와 달리 사진은 하나의 사조 및 경향으로서 리얼리즘을 수용하지 않았던 것이다.(그 점에서 전후 일본과 한국에서 하나의 경향으로 나타났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진’(일본)과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한국)은 매우 특별한 경우로서 이에 대한 비평적 고찰이 요구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의 사조 및 경향으로서 이제껏 논의되지 않았던 리얼리즘 사진이 90년대 후반에 들어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등장한 까닭은 또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가장 실질적이고도 적절한 답을 해줄 사람은 아마 사진가 제프 월(Jeff Wall)이나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Phillip-Lorca diCorcia) 혹은 사진평론가 수잔 웰리(Susan Weiley)가 될 것이나, 나는 오히려 우리의 문학평론가 최유찬의 저서 ꡔ리얼리즘 이론과 실제비평ꡕ(도서출판 두리, 1992)에서 더 적절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유찬은 「오늘의 사실주의와 그 창작방법」이라는 소제목에서 리얼리즘과 관계된 오늘의 창작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현실의 변화가 창작방법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것은 객관적인 현실의 변화와 인간의 주관에 인식된 새로운 현실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둘째, 현실을 인식하는 방법과 표현수단의 변화는 인식의 변화는 물론이고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의미작용을 생산한다. 셋째, 재현대상의 현실을 인식하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방법은 그 시대의 주요 창작방법에 따르며, 서로 다른 현실에서 설정되는 현실인식 방법은 동시대의 표현의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실주의 창작방법이란 현실의 변화에 따라 부단히 변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본 다는 최유찬의 관점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한 역사적 조건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의 논리는 포스트리얼리즘이 이 시대에 다시 등장할 수 있는 세 가지 발생적 조건을 정당화시킨다. 맨 먼저, 시대에 따른 리얼리즘의 인식변화에 대한 당위성을 강화시켜 주고 있으며, 둘째는 리얼리즘이 현실에 따라, 조건에 따라,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증거하고, 그리고 셋째는 서로 다른 사회적, 문화적 현실에 따라 그 표현방법이 달라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리얼리즘이 사실주의로 해석되기보다는 현실주의로 해석되는 것이 보다 적절하며, 또한 리얼리즘이란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이야기 한 것도 그 동안 사진을 리얼리즘 자체로 믿었던 과거 재현 리얼리티에 대한 성찰의 기반이 되고 있다.
90년대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조건은 사실적인 재현과 현실적인 재현의 경계에서 나왔다. 즉,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토대는 스트레이트 포토와 이른바 메이킹 포토의 경계점에서 나온 것으로서, 스트레이트적인 요소와 메이킹적인 요소를 적절히 절충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경계점이란 사실주의와 현실주의의 경계점이기도 한데, 만약 리얼리즘이 사실성과 현실성을 토대로 삼는다면, 스트레이트적인 요소는 사실성으로서, 그리고 메이킹적인 요소는 현실성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에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붙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연출성의 문제, 예컨대 인공성이 개입하는 문제는 최유찬의 글 「오늘의 사실주의와 그 창작방법」에서 예를 들었던 것처럼 현실의 변화 및 인식의 변화에 따른 인공성의 수용이다. 그래서 절대 사실성을 고수했던 과거의 리얼리즘과 달리 변화된 사회현실에서 싹튼 새로운 전형의 리얼리즘이기에 포스트리얼리즘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또 다른 발생적 조건은 그 동안 줄곧 리얼리즘을 옭아맸던 당파성 혹은 사상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게 된 데서 나온 것이다. 리얼리즘의 여러 측면 중에서 특히 논란이 됐던 부분은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현실의 모순성과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른 당파적, 계급적 이데올로기인데, 이것들이 무의미해졌다는 오늘의 현실인식이 포스트리얼리즘을 탄생시킨 것이다. 즉 오늘의 리얼리즘이 과거의 이념 중심적이고 계급 중심적인 리얼리즘과는 달리, 사회속에서 개인들이 조성하는 환경 중심적이고, 타자 중심적이고, 시추에이션 중심적인 문화적 리얼리즘으로 변모했다는 것이 현대 포스트리얼리즘의 발생조건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세 가지 태동조건을 다시 정리하자면,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국 현실변화에 따른 리얼리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사실주의에서 현실주의로), 테크놀로지 시대에 따른 창작적 방법론의 변화가(자연성에서 인공성으로), 그리고 물질중심시대를 맞아 재현대상의 당파적, 사상적 이데올로기의 해체에서(계급성에서 계층성으로)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은 태동된 것이다.
나.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창작방법
예술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창작방법의 변화는 그 시대의 현실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리얼리즘에 대한 해석도 달라진 것이고, 사진에 대한 인식도 달라진 것이다. 재현 리얼리티에 대한 의문을 촉발했던 90년대는 ‘사진=진실’이라는 등식을 믿지 않으려 했으며, 사진이 현실의 거울이라는 오랜 관용어마저도 회의하게 되었다. 아무런 조작 없이 눈에 보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찍으면 진실이고, 현실이고, 사실이 된다는 말을 어느 나라,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게 된 사회가 90년대이다. 그렇다고 보면 90년대가 저물어 가는 시점에 리얼리즘이 새로운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은 정말 우연치 않은 일이다.
오늘날 사회적 현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계 어느 나라나 대동소이해 가고 있음을 볼 때, 지구촌 곳곳에서 펼쳐지는 현대인의 삶이야말로 새로운 리얼리즘의 형상이 아닐 수 없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은 바로 그러한 확실히 획일화되어 가는 현대사회의 모습과 현대인의 일상적 삶을 주된 소재로 삼고 있다. 그렇기 위해서 현실감 넘치는 인위적인 연출을 감행한다. 인공성의 영역은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주된 창작방법이며, 거의 대다수 사진들이 의식적으로든, 전략적으로든 일상을 세트화 시키거나 대상을 철저히 연출시킨다. 그러나 비록 연출이되 허구가 아닌 철저한 진실의 형상이며, 일상 속에서 흔히 마주치고 겪게 되는 현실의 단면으로서 삶의 세부이다.

▲ 티나 바니, <Friends and Relations>, 1990, color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창작방법은 80년대 초반에 처음 나타난다.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의 작품이 맨 먼저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화에 대한 현실주의 시각을 드러냈고, 이어 캐나다 벤쿠버의 제프 월이 80년대 중반부터 다소 개념적인 방법으로 동시대 사회현상을 사진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미치 엡스타인이 도시풍경에서 현실풍경으로 방향전환을 하면서 유사한 경향성을 띠었고, 8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부터 티나 바니가 가정의 일상을 강력한 시각으로 표출하면서 점차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전형성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또한 다큐멘터리 사진에서도 어프로치는 다르지만 영국의 마틴 파처럼 현대문화의 단면들을 강력한 메시지, 인상적인 컬러를 통해서 과거와 다른 새로운 전형의 뉴 다큐멘터리 사진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80년대 포스트리얼리즘의 경향성은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90년대에 들면서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와 제프 월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들의 방법론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뒤따라 스테판 엑슬러, 사라 존스, 한나 스타키, 앤 자할카, 샘 타일러-우드, 에스코 만니코 등 주로 유럽권의 사진가들로부터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전형성이 확보되기 시작했다. 이들 사진들의 공통적인 요소들, 이를테면 스틸 라이프(Still Life) 식의 재현성, 디스플레이적인 장식성, 연극적인 제스처, 에니메이션적인 동작, 그리고 인테리어적인 실내풍경 등, 한 화면에 삶의 양식들을 모두 채워놓은 영화적 미장센(mise-en-scene) 수법이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전형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이들이 지향했던 메시지도 주목을 받았는데 대체적으로 개인에게 작용하는 사회의 영향 내지는 사회 속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탐구하는 것이거나, 소외를 유발시키는 환경적 요소들을 드러내거나, 사회구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거의 무조건적으로 사회적 기능들을 수행, 답습해야 하는 동시대인들의 상황을 세밀히 따지는 것이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메시지이다. 그래서 사진은 인위적으로 연출된 영화의 세트처럼 보이기도 하고, 문학적 서사가 진행중인 연극의 단막극처럼 단절된 보습을 보이기도 한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이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과 만나고 문학과도 만난다는 말은 이와 같이 현실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인위적인 창작방법에 의해 현실을 세팅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에 대한 이론 형성은 90년대 중반에 서서히 시작되었다. 물론 이전에 정치사회학적 관점에서 ‘Post-Realism’이란 용어는 소통되어 왔고, 이와 관련된 책들도 적지 않게 출간되었다. 그러나 예술분야에서 크게 공론화 된 적은 없었으며, 사진분야에서도 처음부터 학술포럼을 통해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와 제프 월 작품에 대한 작품집 서문을 통해서, 그리고 이들에 대한 저널들의 평문에서 그 단초가 마련되었고, 그러다가 1995년 봄 사진평론가 수잔 웰리가 ꡔ아트포럼ꡕ에 이들 사진의 경향성을 조심스럽게 개진한 이후로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 사진에 대한 프란체스코 보나미의 글(플래시 아트 95년 여름호), 사라 존스에 대한 존 실리스(John Slyce)의 글(플래시 아트 99년 5-6월호), 그리고 가장 최근 마이클 브렌슨(Michael Brenson)과 마델린 그린츠텐(Madeleine Grynsztejn)의 대담(아트포럼 99년 9월호)에 이르기까지 간단없이 이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 정강, <잃다>, 1998, color ▲ 김옥선, <영진빌라 201호>, 1999, color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은 그 경향성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 사진으로 혹은 구성사진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러나 80년대 맹위를 떨쳤던 포스트모더니즘 사진과 구성사진(이른바 ‘만드는 사진’)과는 전혀 다른 어프로치이다. 언뜻 생각할 때 내용이 유사하다고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전혀 다른 맥락이며, 형식에서도 유사한 창작방법을 취하고 있지만 전적으로 다른 표현방법이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은 그것들과 달리 실제로 일어나는 현실적인 삶을 겨냥하며, 비록 연출이라는 인공성을 공통적으로 채택하지만 철저히 현대사회의 모순과 불합리함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그것들과는 맥락을 달리한다.
때문에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창작방법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도와 컨셉이 바로 보인다. 모두 컬러사진이며, 계층적 삶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인공조명에 의한 삶의 도구들이 현실감 있게 드러난다. 세팅은 주방, 거실, 침실 등 일상의 가정을 주된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변두리 외곽지역, 그 다음으로는 도시의 특정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세부적인 연출로 들어가면 대상들은 거의 절대적으로 침묵하고 있으며, 서로간의 시선이 부딪치는 일이 없다. 세트는 대단히 장식적이고 화려하며, 전체적으로 순간정지(혹은 일시정지)의 느낌이 강하다. 일상적 삶의 모습을 예리하게 자름으로써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모두 새로운 리얼리즘의 전형성인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제프 월의 사진이 거의 교과서적으로 그 전형성을 보여주고 있고, 한국 현대사진에서도 그 같은 경향성을 볼 수가 있는데 이를테면 김상길의 사진, 박경일의 사진, 정강의 사진, 김선민의 사진, 김옥선의 사진에서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특징을 볼 수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사진이 포스트리얼리즘에 대해 자기주장을 한다거나, 그것들을 수용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들의 사진이 유사한 경향성을 띤다는 것은 그들도 현대의 변화된 삶과 변화된 사진의 경향성을 읽는다는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나 유사한 구조의 아파트에서 살고, 비슷한 주방과 거실, 침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똑같은 스타일의 옷을 입고 차를 타며 살아간다. 전세계가 이미 삶의 구조를 공통적으로 향유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때문에 우리의 몇몇 작가들이 포스트리얼리즘을 인식했건 못했건 간에, 서구사진을 모방했건 답습했건 간에, 이미 그러한 사진들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현실의 변화가 창작방법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고, 현실을 인식하는 방법과 현실의 조건들이 재현대상의 형상을 바꿨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 이미 서구화되었고, 문화적 삶 역시 상당부분 세계화됐음을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 작가들이 포스트리얼리즘의
경향성을 알았건 몰랐건 간에, 그 문화적 컨텍스트만은 세계와 공유하고 있고 현대사회의 보편성과 전체성을 그들과 똑같이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뿐만 아니다. 우리의 몇몇 작가들의 창작방법이(혹은 표현형식이) 제프 월이나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와 같은 소위 국제적인 작가들의 표현방식과 유사하더라도, 창작방법의 변화는 그 시대 현실의 변화에 따른다고 하는 현대미술의 경향성을 미루어 볼 때 우리의 현대사진이 서구적인 삶에서 태동한 표현형식을 차용 내지는 수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리얼리즘에 대한 현실인식도 마찬가지이다. 경향성이야 다르겠지만 그들 사진이나 우리 사진이나 모델과 장소만 다를 뿐 현실을 인식하는 방법과 표현방법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특히 포스트리얼리즘이 사실성보다는 현실성에 초점을 맞추고, 현대사회의 삶의 양상을 환기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면, 우리 사진의 유사한 경향성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리얼리즘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났던 루카치가 “새로움은 전체적인 역사적 현상이며, 사회생활 전체를 포괄하고 전체에 침투하는 변화”라고 했듯이, 리얼리즘은 보편적, 객관적 사회현실이 인간의 구체적 삶의 형태들 속에 어떻게 관철되어 운동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 형상은 분명히 살아있는 인간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형상일 뿐 아니라, 분명 작가의 주․객관적인 조건에 놓여있는 보편적 형상에 다름 아니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도 그러한 리얼리즘의 현대적인 모습일 뿐인 것이다.
그 점에서 현대사회의 멘털(mental) 국면과 피지컬(physical) 국면을 교묘하게 접합시켰던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의 사진은 이 시대 리얼리즘의 모습을 재인식시키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본다. 그의 작품을 평했던 프란체스코 보나미(Francesco Bonami)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시대는 이제 다시 리얼리즘을 호출하고 있다. 그것은 리얼리즘을 그 자체로 인식하여 리얼리즘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하지 않았던 사진을 호출한 것이고, 사진으로 하여금 새로운 임무부여를 한 것이기도 하다. 사진이 사실주의로부터 멀어지고, 대신 현실주의로 다가간 지금, 비로소 사진에게 리얼리즘을 말하게 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또 계급적인 것과 사상적인 것과 무관해진 오늘의 리얼리즘이 이미 스스로 그것들을 초월한 세상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스무 살의 감성 TTL’ 광고는 우리 삶의 멘털과 피지컬 국면, 예컨대 자연과 인공의 국면이 결국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임을 보여준다. 사진도 마침내 그것들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출처 : 진동선지음, 현대사진의 쟁점, 푸른세상 77p~89p
근현대미술이 그랬듯이 사진도 누군가에 의해서 처음 어떠한 모습들이 선보이게 되면 뒤따라서 유행처럼 그러한 사진의 모습들이 속속 나타나게 되고, 그리고 난 다음에는 이에 따른 이론이 만들어져 이내 하나의 장르 혹은 경향으로서 예술적 틀을 제공하곤 한다. 그러한 사진사적 예라면 아마 19세기의 ‘픽토리얼(Pictorial) 포토’, 20세기 초반의 ‘스트레이트(Straight) 포토’를 들 수 있겠고, 현대사진에서는 6-70년대의 ‘컨셉추얼(Conceptual) 포토’와 80년대의 ‘컨스트럭티드(Constructed) 포토’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최근 현대사진에 ‘포스트리얼리즘 사진(Post-Realism Photo)’이라는 새로운 경향이 확산되고 있고, 이제 국제적으로 하나의 형식으로서 자리하려는 것 같다. 늘 이즘(ism)을 좋아하고, 새로운 이론에 들떠 있는 사람들이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지는 것이 이즘이고 이론이지만, 그러나 포스트리얼리즘의 경우 모처럼 찾아온 사진적 이즘이자 과거에 없었던 사진의 리얼리즘 논의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8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사진이나 구성사진이 이즘 또는 경향으로서 널리 유행했던 적은 있지만 그것들은 사진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 현대미술 전반에 걸쳐서 나타난 시대사적인 이즘이자 이론이었다. 때문에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경우는 사진계 내부로부터 자생적으로 태동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은 ‘포스트’라는 접두어를 달고 나타났지만 그러나 아직 명료한 이론적 체계가 세워지지 않은 상태라 단정지어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현재 이러한 경향의 사진들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고, 또 우리 나라에서도 유사한 스타일의 사진들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현대사진의 맥락에서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가.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요건

▲ 제프 월, <The quarrel>, 1988, color
동서양 근현대사에서 ‘리얼리즘’ 만큼 그 성격규정을 두고 첨예하게 대립했던 사조도 없을 것이다. 엥겔스로부터 고리끼, 루카치, 브레히트, 블로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는 임화로부터 김기진, 김남천, 백낙청, 염무웅에 이르기까지 사상과 문학에서 리얼리즘은 가장 뜨거운 근현대사의 논점이었다. 따라서 리얼리즘은 지금도 그 성격규정이 어렵고 제대로 정체를 밝힐 수 없는 난제로 남아 있는데, 리얼리즘이 이처럼 난맥상을 보였던 것은 일차적으로 사실주의와 리얼리즘에 대한 부정확한 인식과 이에 따른 작가의 창작태도와 표현방법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사 160년을 회고할 때 사진만은 이러한 시대사적인 리얼리즘 논쟁에서 멀찍이 물러서 있었던 것 같다. ‘리얼리티(Reality)’라는 말은 사진사

▲ 샘 타일러-우드, <Five Revolutionary Seconds>, 1999, color
문맥에서 빈번히 쓰이고 또 통용되었던 말이지만 리얼리즘이란 말은 사진의 역사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진의 속성상 가장 빈번하게 쓰여질 걸로 예상된 리얼리즘이 이처럼 전체 사진 텍스트에서 찾기 보기 어려웠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진이 스스로 그 속성을 리얼리즘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사진의 모습을 스스로 리얼리즘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문학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던 리얼리즘 문학이나 혹은 미술에서의 ‘극 사실주의’와 달리 사진은 하나의 사조 및 경향으로서 리얼리즘을 수용하지 않았던 것이다.(그 점에서 전후 일본과 한국에서 하나의 경향으로 나타났던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진’(일본)과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한국)은 매우 특별한 경우로서 이에 대한 비평적 고찰이 요구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의 사조 및 경향으로서 이제껏 논의되지 않았던 리얼리즘 사진이 90년대 후반에 들어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등장한 까닭은 또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가장 실질적이고도 적절한 답을 해줄 사람은 아마 사진가 제프 월(Jeff Wall)이나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Phillip-Lorca diCorcia) 혹은 사진평론가 수잔 웰리(Susan Weiley)가 될 것이나, 나는 오히려 우리의 문학평론가 최유찬의 저서 ꡔ리얼리즘 이론과 실제비평ꡕ(도서출판 두리, 1992)에서 더 적절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최유찬은 「오늘의 사실주의와 그 창작방법」이라는 소제목에서 리얼리즘과 관계된 오늘의 창작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첫째, 현실의 변화가 창작방법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그것은 객관적인 현실의 변화와 인간의 주관에 인식된 새로운 현실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둘째, 현실을 인식하는 방법과 표현수단의 변화는 인식의 변화는 물론이고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의미작용을 생산한다. 셋째, 재현대상의 현실을 인식하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방법은 그 시대의 주요 창작방법에 따르며, 서로 다른 현실에서 설정되는 현실인식 방법은 동시대의 표현의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사실주의 창작방법이란 현실의 변화에 따라 부단히 변화할 수 있는 것으로 본 다는 최유찬의 관점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 대한 역사적 조건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의 논리는 포스트리얼리즘이 이 시대에 다시 등장할 수 있는 세 가지 발생적 조건을 정당화시킨다. 맨 먼저, 시대에 따른 리얼리즘의 인식변화에 대한 당위성을 강화시켜 주고 있으며, 둘째는 리얼리즘이 현실에 따라, 조건에 따라, 환경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증거하고, 그리고 셋째는 서로 다른 사회적, 문화적 현실에 따라 그 표현방법이 달라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리얼리즘이 사실주의로 해석되기보다는 현실주의로 해석되는 것이 보다 적절하며, 또한 리얼리즘이란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이야기 한 것도 그 동안 사진을 리얼리즘 자체로 믿었던 과거 재현 리얼리티에 대한 성찰의 기반이 되고 있다.
90년대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조건은 사실적인 재현과 현실적인 재현의 경계에서 나왔다. 즉,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토대는 스트레이트 포토와 이른바 메이킹 포토의 경계점에서 나온 것으로서, 스트레이트적인 요소와 메이킹적인 요소를 적절히 절충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경계점이란 사실주의와 현실주의의 경계점이기도 한데, 만약 리얼리즘이 사실성과 현실성을 토대로 삼는다면, 스트레이트적인 요소는 사실성으로서, 그리고 메이킹적인 요소는 현실성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에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붙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연출성의 문제, 예컨대 인공성이 개입하는 문제는 최유찬의 글 「오늘의 사실주의와 그 창작방법」에서 예를 들었던 것처럼 현실의 변화 및 인식의 변화에 따른 인공성의 수용이다. 그래서 절대 사실성을 고수했던 과거의 리얼리즘과 달리 변화된 사회현실에서 싹튼 새로운 전형의 리얼리즘이기에 포스트리얼리즘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또 다른 발생적 조건은 그 동안 줄곧 리얼리즘을 옭아맸던 당파성 혹은 사상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게 된 데서 나온 것이다. 리얼리즘의 여러 측면 중에서 특히 논란이 됐던 부분은 자본주의 발전에 따른 현실의 모순성과 변증법적 유물론에 따른 당파적, 계급적 이데올로기인데, 이것들이 무의미해졌다는 오늘의 현실인식이 포스트리얼리즘을 탄생시킨 것이다. 즉 오늘의 리얼리즘이 과거의 이념 중심적이고 계급 중심적인 리얼리즘과는 달리, 사회속에서 개인들이 조성하는 환경 중심적이고, 타자 중심적이고, 시추에이션 중심적인 문화적 리얼리즘으로 변모했다는 것이 현대 포스트리얼리즘의 발생조건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세 가지 태동조건을 다시 정리하자면, 고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결국 현실변화에 따른 리얼리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사실주의에서 현실주의로), 테크놀로지 시대에 따른 창작적 방법론의 변화가(자연성에서 인공성으로), 그리고 물질중심시대를 맞아 재현대상의 당파적, 사상적 이데올로기의 해체에서(계급성에서 계층성으로)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은 태동된 것이다.
나.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창작방법
예술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창작방법의 변화는 그 시대의 현실의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리얼리즘에 대한 해석도 달라진 것이고, 사진에 대한 인식도 달라진 것이다. 재현 리얼리티에 대한 의문을 촉발했던 90년대는 ‘사진=진실’이라는 등식을 믿지 않으려 했으며, 사진이 현실의 거울이라는 오랜 관용어마저도 회의하게 되었다. 아무런 조작 없이 눈에 보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찍으면 진실이고, 현실이고, 사실이 된다는 말을 어느 나라, 어느 누구도 확신할 수 없게 된 사회가 90년대이다. 그렇다고 보면 90년대가 저물어 가는 시점에 리얼리즘이 새로운 모습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은 정말 우연치 않은 일이다.
오늘날 사회적 현실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세계 어느 나라나 대동소이해 가고 있음을 볼 때, 지구촌 곳곳에서 펼쳐지는 현대인의 삶이야말로 새로운 리얼리즘의 형상이 아닐 수 없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은 바로 그러한 확실히 획일화되어 가는 현대사회의 모습과 현대인의 일상적 삶을 주된 소재로 삼고 있다. 그렇기 위해서 현실감 넘치는 인위적인 연출을 감행한다. 인공성의 영역은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주된 창작방법이며, 거의 대다수 사진들이 의식적으로든, 전략적으로든 일상을 세트화 시키거나 대상을 철저히 연출시킨다. 그러나 비록 연출이되 허구가 아닌 철저한 진실의 형상이며, 일상 속에서 흔히 마주치고 겪게 되는 현실의 단면으로서 삶의 세부이다.

▲ 티나 바니, <Friends and Relations>, 1990, color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창작방법은 80년대 초반에 처음 나타난다.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의 작품이 맨 먼저 새로운 사회, 새로운 문화에 대한 현실주의 시각을 드러냈고, 이어 캐나다 벤쿠버의 제프 월이 80년대 중반부터 다소 개념적인 방법으로 동시대 사회현상을 사진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미치 엡스타인이 도시풍경에서 현실풍경으로 방향전환을 하면서 유사한 경향성을 띠었고, 8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부터 티나 바니가 가정의 일상을 강력한 시각으로 표출하면서 점차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전형성을 창조하기 시작했다. 또한 다큐멘터리 사진에서도 어프로치는 다르지만 영국의 마틴 파처럼 현대문화의 단면들을 강력한 메시지, 인상적인 컬러를 통해서 과거와 다른 새로운 전형의 뉴 다큐멘터리 사진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80년대 포스트리얼리즘의 경향성은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90년대에 들면서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와 제프 월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들의 방법론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뒤따라 스테판 엑슬러, 사라 존스, 한나 스타키, 앤 자할카, 샘 타일러-우드, 에스코 만니코 등 주로 유럽권의 사진가들로부터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전형성이 확보되기 시작했다. 이들 사진들의 공통적인 요소들, 이를테면 스틸 라이프(Still Life) 식의 재현성, 디스플레이적인 장식성, 연극적인 제스처, 에니메이션적인 동작, 그리고 인테리어적인 실내풍경 등, 한 화면에 삶의 양식들을 모두 채워놓은 영화적 미장센(mise-en-scene) 수법이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전형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이들이 지향했던 메시지도 주목을 받았는데 대체적으로 개인에게 작용하는 사회의 영향 내지는 사회 속에서의 개인의 역할을 탐구하는 것이거나, 소외를 유발시키는 환경적 요소들을 드러내거나, 사회구조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거의 무조건적으로 사회적 기능들을 수행, 답습해야 하는 동시대인들의 상황을 세밀히 따지는 것이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메시지이다. 그래서 사진은 인위적으로 연출된 영화의 세트처럼 보이기도 하고, 문학적 서사가 진행중인 연극의 단막극처럼 단절된 보습을 보이기도 한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이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과 만나고 문학과도 만난다는 말은 이와 같이 현실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인위적인 창작방법에 의해 현실을 세팅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에 대한 이론 형성은 90년대 중반에 서서히 시작되었다. 물론 이전에 정치사회학적 관점에서 ‘Post-Realism’이란 용어는 소통되어 왔고, 이와 관련된 책들도 적지 않게 출간되었다. 그러나 예술분야에서 크게 공론화 된 적은 없었으며, 사진분야에서도 처음부터 학술포럼을 통해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와 제프 월 작품에 대한 작품집 서문을 통해서, 그리고 이들에 대한 저널들의 평문에서 그 단초가 마련되었고, 그러다가 1995년 봄 사진평론가 수잔 웰리가 ꡔ아트포럼ꡕ에 이들 사진의 경향성을 조심스럽게 개진한 이후로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 사진에 대한 프란체스코 보나미의 글(플래시 아트 95년 여름호), 사라 존스에 대한 존 실리스(John Slyce)의 글(플래시 아트 99년 5-6월호), 그리고 가장 최근 마이클 브렌슨(Michael Brenson)과 마델린 그린츠텐(Madeleine Grynsztejn)의 대담(아트포럼 99년 9월호)에 이르기까지 간단없이 이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다.

▲ 정강, <잃다>, 1998, color ▲ 김옥선, <영진빌라 201호>, 1999, color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은 그 경향성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 사진으로 혹은 구성사진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러나 80년대 맹위를 떨쳤던 포스트모더니즘 사진과 구성사진(이른바 ‘만드는 사진’)과는 전혀 다른 어프로치이다. 언뜻 생각할 때 내용이 유사하다고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전혀 다른 맥락이며, 형식에서도 유사한 창작방법을 취하고 있지만 전적으로 다른 표현방법이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은 그것들과 달리 실제로 일어나는 현실적인 삶을 겨냥하며, 비록 연출이라는 인공성을 공통적으로 채택하지만 철저히 현대사회의 모순과 불합리함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그것들과는 맥락을 달리한다.
때문에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창작방법은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의도와 컨셉이 바로 보인다. 모두 컬러사진이며, 계층적 삶의 모습을 현실감 있게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인공조명에 의한 삶의 도구들이 현실감 있게 드러난다. 세팅은 주방, 거실, 침실 등 일상의 가정을 주된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변두리 외곽지역, 그 다음으로는 도시의 특정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세부적인 연출로 들어가면 대상들은 거의 절대적으로 침묵하고 있으며, 서로간의 시선이 부딪치는 일이 없다. 세트는 대단히 장식적이고 화려하며, 전체적으로 순간정지(혹은 일시정지)의 느낌이 강하다. 일상적 삶의 모습을 예리하게 자름으로써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모두 새로운 리얼리즘의 전형성인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제프 월의 사진이 거의 교과서적으로 그 전형성을 보여주고 있고, 한국 현대사진에서도 그 같은 경향성을 볼 수가 있는데 이를테면 김상길의 사진, 박경일의 사진, 정강의 사진, 김선민의 사진, 김옥선의 사진에서 포스트리얼리즘 사진의 특징을 볼 수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사진이 포스트리얼리즘에 대해 자기주장을 한다거나, 그것들을 수용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들의 사진이 유사한 경향성을 띤다는 것은 그들도 현대의 변화된 삶과 변화된 사진의 경향성을 읽는다는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나 유사한 구조의 아파트에서 살고, 비슷한 주방과 거실, 침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똑같은 스타일의 옷을 입고 차를 타며 살아간다. 전세계가 이미 삶의 구조를 공통적으로 향유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때문에 우리의 몇몇 작가들이 포스트리얼리즘을 인식했건 못했건 간에, 서구사진을 모방했건 답습했건 간에, 이미 그러한 사진들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현실의 변화가 창작방법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이고, 현실을 인식하는 방법과 현실의 조건들이 재현대상의 형상을 바꿨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 이미 서구화되었고, 문화적 삶 역시 상당부분 세계화됐음을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 작가들이 포스트리얼리즘의
경향성을 알았건 몰랐건 간에, 그 문화적 컨텍스트만은 세계와 공유하고 있고 현대사회의 보편성과 전체성을 그들과 똑같이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뿐만 아니다. 우리의 몇몇 작가들의 창작방법이(혹은 표현형식이) 제프 월이나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와 같은 소위 국제적인 작가들의 표현방식과 유사하더라도, 창작방법의 변화는 그 시대 현실의 변화에 따른다고 하는 현대미술의 경향성을 미루어 볼 때 우리의 현대사진이 서구적인 삶에서 태동한 표현형식을 차용 내지는 수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리얼리즘에 대한 현실인식도 마찬가지이다. 경향성이야 다르겠지만 그들 사진이나 우리 사진이나 모델과 장소만 다를 뿐 현실을 인식하는 방법과 표현방법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 특히 포스트리얼리즘이 사실성보다는 현실성에 초점을 맞추고, 현대사회의 삶의 양상을 환기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면, 우리 사진의 유사한 경향성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리얼리즘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났던 루카치가 “새로움은 전체적인 역사적 현상이며, 사회생활 전체를 포괄하고 전체에 침투하는 변화”라고 했듯이, 리얼리즘은 보편적, 객관적 사회현실이 인간의 구체적 삶의 형태들 속에 어떻게 관철되어 운동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 형상은 분명히 살아있는 인간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형상일 뿐 아니라, 분명 작가의 주․객관적인 조건에 놓여있는 보편적 형상에 다름 아니다. 포스트리얼리즘 사진도 그러한 리얼리즘의 현대적인 모습일 뿐인 것이다.
그 점에서 현대사회의 멘털(mental) 국면과 피지컬(physical) 국면을 교묘하게 접합시켰던 필립-로르카 디코르시아의 사진은 이 시대 리얼리즘의 모습을 재인식시키는데 부족함이 없다고 본다. 그의 작품을 평했던 프란체스코 보나미(Francesco Bonami)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시대는 이제 다시 리얼리즘을 호출하고 있다. 그것은 리얼리즘을 그 자체로 인식하여 리얼리즘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하지 않았던 사진을 호출한 것이고, 사진으로 하여금 새로운 임무부여를 한 것이기도 하다. 사진이 사실주의로부터 멀어지고, 대신 현실주의로 다가간 지금, 비로소 사진에게 리얼리즘을 말하게 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또 계급적인 것과 사상적인 것과 무관해진 오늘의 리얼리즘이 이미 스스로 그것들을 초월한 세상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스무 살의 감성 TTL’ 광고는 우리 삶의 멘털과 피지컬 국면, 예컨대 자연과 인공의 국면이 결국 우리 시대의 리얼리즘임을 보여준다. 사진도 마침내 그것들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출처 : 진동선지음, 현대사진의 쟁점, 푸른세상 77p~89p

